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 [[정조(조선)|정조]] 시기 === 아들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즉위한 뒤에 '''‘혜경궁(惠慶宮)’'''이라는 [[궁호]]를 받았으며 '자궁(慈宮)'이라 불리게 된다. 전통적으로 [[조선/왕실|조선 왕실]]에서 [[조선/왕사|국왕]]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'자전(慈殿)'이었다.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[[정조(조선)|왕]]의 어머니이자 [[조선/왕실|왕실]] [[내명부]] 여인 중 나이로 치면,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 생전에 [[사도세자]]가 [[조선/왕사|국왕]]으로 [[추존|추증]]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[[왕대비]]가 되지 못했다. 또,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백부 [[효장세자]]의 아들로 [[양자(가족)|양자]] 입적되면서 [[법|법적]]으로는 [[정조(조선)|국왕]]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'자전(慈殿)'이라는 칭호 조차도 쓰지 못하고 그 [[지위]]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했다. 당시에 [[조선/왕실|왕실]]의 [[내명부]] [[서열]] 1위이자 최고어른은 혜경궁 홍씨의 시어머니이자 그녀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[[왕대비]]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 김씨]]였다. 만일 당시에 혜경궁 홍씨가 아들 [[정조(조선)|정조]]재위 시기에 [[사도세자|남편]]이 [[조선/왕사|국왕]]으로 [[추존]]되었다면 자신은 [[왕대비]]가 되고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가 [[대왕대비]]가 되었을 것이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궁여지책으로 1단계 낮은 '자궁(慈宮)'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[[왕대비]]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 김씨]]보다는 낮고 [[왕비|중전]] [[효의왕후|효의왕후 김씨]]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[[대비]](大妃)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친어머니를 직접 위로했다.[* 사실 당시 [[내명부]] 서열은 왕대비전(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), 내전([[효의왕후]]), 자궁([[혜경궁 홍씨]]), 가순궁([[수빈 박씨]]) 순서로 [[효의왕후]]가 시어머니인 [[혜경궁 홍씨]]보다 높은 대우를 받기는 했다. 문안 순서도 [[내명부]] 위계를 그대로 따라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왕대비]], [[효의왕후|왕비]]를 거친 후에야 혜경궁에게 문안 인사가 돌아갔다. 4명 모두 [[내명부]] 무품이기는 하나 혜경궁 홍씨는 어디까지나 [[세자빈|왕세자빈]]의 [[신분]]이니 [[효의왕후|왕비]]에 우선할 수는 없던 것. 심지어 친손자 [[순조]]가 [[1800년]](정조 24년), [[조선/왕사|왕위]]에 즉위하고 나서는 서열이 하나 더 밀려 대왕대비전(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), 왕대비전([[효의왕후]]), 내전([[순원왕후]]), 자궁([[혜경궁 홍씨]]), 가순궁([[수빈 박씨]]) 순서였다.] 혜빈 홍씨가 [[궁호]]인 '''‘혜경궁(惠慶宮)’'''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. [[정조(조선)|아들]]의 즉위 초반 반대파들의 [[공격]]에 [[풍산 홍씨|친정]]이 수난을 당했으나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끝까지 외가를 보호했고 즉위 중후반 이후로는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직접 [[풍산 홍씨|외가]]에 대한 [[명예]] 회복에 나서며 아들의 극진한 [[효도]]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낸다.[* 외할아버지 [[홍봉한]]에게 '익정공(翼貞公)'이라는 [[시호]]를 내리고 친히 제문을 지어 수시로 내리고 [[풍산 홍씨|외가]]의 [[족보]]나 [[풍산 홍씨|외가]] [[친척]]들의 친목계인 화수회까지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직접 챙겨 주관하며 [[홍봉한|외조부]]의 생전의 [[상소]]들을 모아 외삼촌인 홍낙임과 함께 상소 문집까지 편찬에 관여하며 직접 서문까지 썼다.] [[1796년]](정조 20년),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혜경궁 홍씨의 [[환갑]] 잔치를 위해 [[수원화성|화성]] 행차를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무려 33년만에 처음으로 ''남편 [[사도세자]]의 [[융건릉|무덤]]^^(현륭원)^^'''에 방문했다. [[정조(조선)|왕]]조차도 [[궁궐]] 밖 외출이 자유롭지는 않았는데 더구나 [[조선/왕실|왕실]] [[내명부]]의 여성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당연히 [[사도세자|남편]]의 무덤은 커녕 [[궁궐]] 밖에 외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. 그런 혜경궁 홍씨가 [[사도세자|남편]]과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. 《[[한중록]]》에 따르면 '[[임오화변]] 당시 앞날이 막막했으나 당시 11살이던 [[정조(조선)|아들]]은 [[조선/왕사|왕]]이 되었고 10살이 되지 않았던 [[청연공주|딸]][[청선공주|들]]은 현재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'며 마음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